편집자는 송언신(宋言愼), 간행자는 송일(宋馹)이다. 분량은 1책, 판종은 목판본이며, 표제와 권수제 모두 ‘여산송씨족보’이다.
체제는 표지, 서문, 후서(後序), 보도(譜圖), 발문 순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시기 다른 족보에서 흔히 보이는 범례, 부록은 없다.
송언신의 서문(1606)에 따르면, 여산송씨는 가전되어 온 보첩이 있었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송언신은 족보 편찬을 위해 동종에 수소문하여 보첩을 구하였고, 어렵사리 송원경이 기록한 보첩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송원경의 보첩은 기본적으로 내용이 소략한데다 이성(異姓)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오히려 동종은 소략하게 다룬 불완전한 것이었다.
이에 송언신은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자신의 친필 초고본을 작성해 두었으나 간행에 이르지는 못했다. 서문의 연대가 1606년인 것으로 보아 초고본이 완성된 것도 이 해로 생각된다. 그러던 중 1610년 족질 송일(宋馹)이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족보 간행에 따른 경비조달 문제를 해결하자 자신의 수고본을 전달하여 간행케 한 것이 바로 이 족보이다. 송일의 발문에 따르면, 당진현감 송요인(宋堯訒), 단양군수 송선(宋瑄), 전의현감 송빙(宋騁) 등이 족보간행에 협조한 것으로 되어 있다.
후서는 바로 송언신이 이러한 간행의 경위를 서술한 것으로 송언신 친필의 초서체로 판각되어 있다. 이 후서의 말미에 ‘후손 호봉 송언신 편집(後孫壺峯宋言愼編輯)’, ‘후손 석곡 송일 재행(後孫石谷宋馹榟行)’이라는 기록이 있어 편집자와 간행자를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보도는 6층 횡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자표는 천자문의 순서가 아닌 숫자로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어 다른 족보와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자녀는 출생순으로 등록하고 있어 이른바 선남후녀(先男後女)의 유교적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적서(嫡庶)는 엄격하게 구분하여 서자(첩자)일 경우는 이름 위에 ‘첩자’라 표기하였다. 계후한 경우에는 이름 위에 ‘계자(繼子)’라 표기하였고, 후사가 없으면 아름 아래에 쌍행으로 ‘무후(無後)’라 표기하였다. 이성(異姓)은 사위와 외손 2대에 한하여 수록되어 있으며, 주기에 있어서도 이름과 관직만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각 인물의 주기(註記)는 개인에 따라 상략이 심한 편이다. 자(字), 호(號), 과거(科擧) 사항, 관직(官職) 사항, 배위(配位) 사항, 묘소(墓所) 위치와 좌향(坐向) 등이 상술된 경우도 있고, 이름만 기록하거나 생원, 진사, 문과 등의 과거 사항이나 관직 사항만 부기도 경우도 있다. 이 족보는 여산송씨족보의 초간본이라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